동학 최시형의 기도의 산, 기도의 삶 ① 일월산 용화동(월간불광)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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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25-10-28 11:10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 김남수
고비원주(高飛遠走), 멀리 도망가거라
동학의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인 『도원기서(道源記書)』에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감옥에 잡혀 목숨이 위태로울 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스승의 명을 받아 경주를 떠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선생(최제우)이 곽덕원에 일러 말하기를,
“경상(최시형을 일컬음)은 지금 성중에 있는가? 오래지 않아 나가서 잡으려 할 것이다. 나의 말이 전해지는 대로 멀리 도망[高飛遠走]하도록 일러라. 만약에 잡히면 일이 매우 위험스럽게 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신중하게 전하라”
하니, 덕원이 말하기를
“경상은 이미 떠났습니다.”
1863년 12월 경이다. 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스승의 마지막은 보지 못했지만, 최시형이 그길로 멀리 도망쳤기에 동학의 법이 이어질 수 있었을 게다. 경주를 떠난 최시형이 안동, 평해, 울진을 거쳐 1865년 봄 도착한 곳이 영양 일월산(日月山) 정상 바로 밑의 용화동 윗대치다.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는 스승의 유훈 따라 일월산 높은 곳이다.
『도원기서』 기록에 따르면 최시형은 “영원히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맹세하고, 자취를 감추었”고, “몸은 산옹(山翁, 산 늙은이)이 되었고, 농사일에 극력 힘을 쓰며, 스스로 발각되고 노출될 위험을 없애” 버렸다. 동학 역사서 『천도교서』에는 “나무숲으로 가옥을 삼고, 생활의 방편은 짚신을 짜는 것에 의지하며 주문을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한다. 최시형은 일월산 용화동에서 6년여를 은거하며 기도했고, 동학의 재건을 모색했다.
최시형은 산을 좋아했던 듯하다. 1863년 서른여덟 나이에 일월산으로 피신해 1898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삶이 ‘도망자’ 신세였고, 산은 도피처였다. 그런데 최시형에게 산은 도피처만이 아니라 훌륭한 기도처이기도 했다. 최시형의 삶은 ‘기도의 삶’이기도 했다. 스승이 남겨준 주문을 외우는 것은 최시형에게 중요한 일과였다. 또 중요한 분기점마다 진행된 49일 기도는 동학을 재건하는 큰 힘이었다.
“사찰과 산에는 우리 도와 합치되는 덕(德)이 있다.”
(寺山은 吾道合德之은이요)
- 유택하, 『동학난중기』에서
훗날 최시형이 태백산 정암사에서 기도를 마친 후 한 말이다. 최시형이 피신한 산속에는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 최시형은 피신하는 과정에서 정선의 정암사와 적조암, 익산의 사자암, 공주의 가섭사를 의식적으로 찾아 49일 기도를 진행했으며, 네 곳은 동학의 재건과 훗날 벌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토대가 됐다.
이외에도 영양의 용화사, 영덕의 형제봉, 상주의 동관음과 청계사, 단양의 묘적사는 최시형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당대에는 이미 폐사됐던 곳도 있지만, 최시형의 자취가 남겨져 있다. 의식적으로 찾은 곳도 있으며, 피신한 그곳에 우연히 암자가 있기도 했다. 몇 곳을 찾아가 보려 한다.
일월산 용화동(龍化洞)
스승의 죽음 이후 최시형이 정착한 일월산(日月山) 용화동(龍化洞)은 산 이름부터가 속칭 ‘기도빨’이 드러나는 곳이다. 용화동은 용화사(龍化寺)라는 절이 있던 곳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최시형이 정착한 곳은 용화동 윗대치[上竹峴, 상죽현]다. 일월산 높은 봉우리 밑에 있는 동네다.
필자는 용화동이라는 아랫마을(하대치)에 용화사라는 절터가 있고, 마을 위로 최시형이 머문 윗대치가 있는 줄 알았다. 그 높은 곳에 절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알아보니 최시형이 머문 윗대치에 바로 용화사가 있었다.
곧바로 영양 일월산으로 답사를 진행했다.

윗대치에는 지금도 삼층석탑이 있어, 그 자리가 본래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윗대치 마을의 중심에 삼층석탑이 있고, 일월산 정상 쪽으로도 마을이 형성돼 있다. 최시형과 가족은 윗대치 어느 곳에 머물다, 후에 스승 최제우의 가족이 어찌어찌 이곳을 찾자 집을 내주고 근처로 옮긴다.
용화사(龍化寺)
최시형이 윗대치에 머문 1860년대에 용화사는 건재했을까? 용화사를 알려주는 문헌 기록이 많지 않아, 현존하는 삼층석탑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18세기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범우고(梵宇攷)』에는 “일월산에 있다[在日月山]”고 기록한다. 1832년경 제작된 「영양현지도」에는 용화사가 표시돼 있지만, 1872년 「지방지도」에는 생략돼 있다. 1899년 편찬된 『영양현지지(英陽郡地誌)』의 지도에는 표시됐지만, 불우(佛宇) 편에는 “일월산에 있지만 지금은 없다[在日月山 今無]”고 기록한다.


주목할 만한 책이 1876년(고종 13) 편찬된 『영지요선(嶺誌要選)』이다. 최석봉(崔錫鳳)이 기존의 기록을 바탕으로 본인의 발품을 들인 책인데, 영양의 사찰로 도성사(道成寺)와 용화사[龍化寺 在日月山]를 기록한다. 최석봉이 일월산을 실제로 답사했다면, 1876년에는 용화사가 건재했을 것이다. 최시형이 일월산에 머물던 시기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 후기에 기록된 지방지도는 이미 폐사된 사찰을 표시한 곳도 있기에, 지도와 기록만으로 용화사가 당대에 실재했는지를 확언할 수 없다.
눈여겨볼 만한 기록이 1871년 진행된 하나의 사건이다. ‘이필제의 난’, 혹은 ‘영해교조신원운동’, ‘영해동학혁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인데 최시형은 이 사건으로 일월산을 떠나게 된다. 이 사건을 기록한 문서에는 ‘일월산’, ‘상죽현’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지만 ‘용화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추정컨대 용화사는 1800년대 어느 시기까지 건재했을 수 있지만, 최시형이 일월산 윗대치에 머물던 시기에는 이미 폐사했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정한다.

현재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용화사 터를 지키고 있다. 석탑의 일부 부재는 사라졌지만,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일월산 높은 곳에 절이 있게 된 연유는 확인하기 어렵다. 성을 지키는 산성사찰(山城寺刹)이거나 역원(驛院)이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해보지만, 근처에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에는 광산이 바로 옆에 있었고, 지금은 밭으로 개간돼 아쉽게도 절의 규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석탑의 위치가 본래 자리인지도 분명치 않은 듯하다.
동학 재건 활동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스승 최제우의 부인과 가족이 피신한 곳 역시 동관음사(東觀音寺)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다. ‘동관리’, ‘동관음’으로 불리는 마을인데, 동학 관련 기록에는 ‘동관암’으로 많이 표기된다.
“뜻하지도 않게 을축년(1865년) 7월, 선생의 보인이 자녀들을 이끌고 찾아왔다. 주인(최시형)이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찢어지고 가슴이 막혀 차마 어떻게 오셨냐고 묻지도 못했다. 별안간에 닥친 일이라 자신의 집에 들게 하고 주인은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 『도원기서』에서
『도원기서』에서는 최제우의 죽음 이후 그 가족이 최시형과 흩어져 상주 동관음으로 피신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최시형이 일월산 용화동에 자리잡은 그해에 부인과 가족이 그리로 옮겨왔다고 기록한다. 다른 기록에는 최시형이 일가를 동관음으로 피신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동관음사는 18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승탑 1기와 사적비가 남아 있다.
어찌됐든 최제우의 가족마저 일월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일월산은 동학 재건의 중심지로 자리잡는다. 최시형은 일월산 용화동을 기도처로 삼아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더불어 숨죽이며 살던 동학의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화동은 스승의 죽음 이후 동학을 재건하는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한다. 스승의 가족도 찾아오며, 스승의 기일을 챙기기도 했다. 스승의 제사를 모시는 것은 흩어진 동학도를 모으고, 붕괴된 조직을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동학도들은 최제우의 기일과 생신일에 맞춰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최시형은 용화동에서 신앙결사를 해 나간다. 아울러 여러 지역을 돌며 동학도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동학 재건 활동은 1871년, 다시 큰 피해를 입는다. 이는 이필제라는 도인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 최시형의 생애는 별도 표시가 없는 경우 윤석산의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참고자료>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유택하, 「동학난중기」, 『정선의 항일민족운동』, 정선문화원, 2021년
이영재, 「일월산 황씨부인 신앙의 형성과 확산」, 『민속학연구』 56집, 국립민속박물관, 2025년
<참조 웹사이트>
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 https://e-donghak.or.kr/archive/
블로그 <별들이>, 영양군 연구자료 https://blog.naver.com/yjmuse1
* 기사원문출처 : www. 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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