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두루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큰스님

정암사

동방(東方)의 청의사미(靑衣沙彌) 자장을 기다렸다가 이름 있는 좋은 터에 탑을 세우게 하라


정암사
이름은 김선종(金善宗)이며 진골(眞骨) 출신인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이다. 일찍 부모를 여윈 이후, 본인의 집을 절로 바꾼 원녕사(元寧寺)를 세웠으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선덕여왕이 대보(臺輔)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636년 왕명으로 제자 10여명과 당(唐)나라에 가서 청량산의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였으며 문수보살로부터 가사(袈裟) 1벌과 사리 1백과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3년간 도를 닦고 화엄종(華嚴宗)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 장경(藏經) 400여 함, 당번, 화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芬皇寺)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皇龍寺)에서 대승론(大乘論)과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설한 후,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다.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의하고 3년 후인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한 후 황룡사의 2대 주지승이 되었다. 또한 영취산에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이듬해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였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제경계소(諸經戒疏)》(10권)와 《출관행법(出觀行法)》을 지어 율부(律部)를 넓혔다. 649년에는 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했으며, 650년 당나라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서울을 떠나 강릉(江陵)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 현 정암사)를 세워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후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로 받들어졌다.
현재는 신라 10성(聖)중의 한사람으로 추대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져 있다.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십송율목차기(十誦律目次記)》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관행법(觀行法)》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자장스님의 주장자이야기


정암사
선장단
정암사
선장단
1300여년전 자장은 정암사를 창건하고 평소 사용하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로 남긴 것이 회생하여 주목으로 자라 적멸보궁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주장자(拄杖子)란 스님이 좌선을 하거나 설법을 할 때에 사용하는 지팡이기에 법을 상징하기도 한다.
보통 스님들이 사용하는 주장자(柱杖子)는 윗부분에 6개의 방울이나 쇠고리가 달려 있다. 이는 이것이 울리는 소리로 벌레나 짐승들이 발에 밟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시키거나 이것들의 접근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6개의 고리는 육도중생들이 모두 해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육환장(六環杖) 이라고도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고찰에는 고승들이 짚고 다니다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싹이 터서 큰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들이 전해지는데, 이는 바로 그 사찰의 정통성 내지는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하겠다.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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