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두루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큰스님

정암사

세계(世系) 및 출가(出家)


정암사
대종사의 법명은 택성(宅成: 鐸聲)이며, 법호는 탄허(呑虛)이다. 속성은 경주 김씨이며, 속명은 금택(金鐸), 자는 간산(艮山)이다. 독립투사인 부친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1913년 1월 15일, 김제 만경면 대동리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향년 71세, 법납 50년) 6월 5일(음 4월 24일)에 월정사 방상굴에서 입적하셨다.
6세에 조부 김병일(金炳一)과 향리의 훈장으로부터 수학하기 시작하여 16세까지 사서(四書) 등 유학서적을 익혔다.
17세에 충남 보령으로 이주하여 면암 최익현의 재전(再傳) 제자 이극종(李克宗) 선생에게 삼경(三經) 및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을 수학하였고, 20세에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를 읽으면서 “도(道)란 무엇인가?”에 의문을 가지면서 음력 8월 14일, 처음 방한암(方漢岩) 스님께 서신을 올렸고, 22세 입산, 출가까지 3년 동안 한암스님과 2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스님은 출가 이후, 이미 탄탄한 학문의 토대 위에 다시 불교를 받아드림으로써 유불선 삼교(三敎)의 사상을 모두 통달할 수 있었다.

수행(修行) 및 오도(悟道)


1934년 음력 9월 5일,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 출가하여 그해 10월 15일, 방한암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당시 스님의 22세였다. 수계 이후 한암스님의 지도 아래, 선원에서 2년 남짓 묵언정진의 수행을 닦았다.
1936년(24세) 6월, 강원도 3본산(유점사, 건봉사, 월정사)은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강원도 3본산 승려연합수련소”를 오대산 상원사에 설치하고, 이에 스님은 은사 한암스님의 증명 아래 중강(中講)으로서 금강경, 기신론, 범망경 등을 강의하였다. 이는 불교계에 초유(初有)의 일이었다.
1939년(27세), 선원(禪院)의 고암, 탄옹(炭翁)스님 등의 요청에 의해 화엄산림(華嚴山林)을 개설, 강의에는 한암스님의 증명 아래 스님이 맡았으며, 이를 계기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현토(懸吐)하였다. 이는 훗날 역경의 저본이 되었다.
1950년(38세), 출가 이후 15년 동안, 한암스님의 지도하에 선원에서의 참선과 아울러 강원(講院)의 대교(大敎) 과정을 두루 섭렵하였다. 경허스님의 선맥(禪脈)을 이은 방한암스님의 철저한 선교일치(禪敎一致)에 의해, 스님은 선(禪)과 교(敎)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원만한 수행과 밝은 안목을 지니셨다. 그것은 한암스님의 철저한 지도와 제자 양성에 대한 애틋한 자비심에서, 그리고 탄허대종사의 큰 그릇이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한 시대의 인물이 탄생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법계(法系)의 전수


정암사

1956년(44세) 4월 1일,

월정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립, 대교과 졸업자 및 그에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를 대상으로 하여, 내전(內典)으로는 화엄경, 기신론, 영가집, 능엄경 등과 외전(外典)으로는 도덕경, 장자, 주역 등의 강의과목으로 설정하여 스님께서 강의를 전담하였다. 당시 수강생으로는 4, 50명이 배출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승려의 행적은 현대불교사를 빛냈고, 세간의 문인(文人)으로는 김종후(문학평론가), 김운학(문학평론가), 박용렬(아동문학가) 등이 있다.

1959년(47세) 11월,

오대산 수도원의 후신인 “영은사 수도원”을 개설, 1962년 10월까지 지속되어, 당시 수도생으로 녹원스님, 도원스님, 각성스님, 인보스님, 혜거스님, 명성스님 등 3, 40명이 배출되었다.

1982년(70세) 11월,

월정사에서 제2회 화엄학 특강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지도는 결코 순탄한 입장에서 이뤄졌던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경제 환경으로 당시 수강생들은 선농(禪農) 겸전(兼全) 및 반농반학(半農半學)의 철저한 수행으로 선교(禪敎)를 함께 닦아나갔다. 이에 현재 배출된 출가자 및 재가자는 현재 조계종의 강원(講院)은 물론 학계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탄허대종사의 이력


  • 1955년 9월

    대한불교 조계종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조실

  • 1962년 10월

    월정사 주지 취임.

  • 1966년 9월

    동국대학교선원(현 정각원) 선원장 취임.

  • 1966년 12월

    동국대역경원(용주사) 초대 역장장(譯場長) 취임.

  • 1969년 7월

    자광사(대전 학하리) 창건.

  • 1972년

    화엄학연구소 설립.

  • 1975년

    동국학원(동국대학교) 이사 취임.

  • 1975년 10월

    인촌문화상 수상.

  • 1983년 6월

    국민훈장 추서(追敍)


역경사업 일람표


스님은 당시 27세, 1939년 “화엄산림”을 개설하여 한암스님의 증명 하에 중강을 맡으면서 불교 경전의 번역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신화엄경합론>을 현토(懸吐)한 후, 이를 계기로 입적까지 역경사업은 그치지 않았다. 불교의 기본경전을 총망라한 15종의 경전을 국역하여 74책을 간행하였는바, 원고 10여 만장으로 등신(等身) 이상이었다.
이의 역경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譯 經 事 業 一 覽 表


서 명

수 량

출판년도

출판사

비 고

六祖法寶檀經

1책

1959

해동불교역경원

48세 출간

普照法語

1책

1963

법보원

51세 출간

新華嚴經合論

47책

1975

화엄학연구소

63세 출간

書狀

1책

1976

敎 林

64세 출간

都序

1책

1976

敎 林

64세 출간

節要

1책

1976

敎 林

64세 출간

禪要

1책

1976

敎 林

64세 출간

楞嚴經

5책

1981

敎 林

69세 출간

起信論

3책

1981

敎 林

69세 출간

金剛經

3책

1981

敎 林

69세 출간

圓覺經

3책

1981

敎 林

69세 출간

緇門

1책

1982

敎 林

70세 출간

初發心自警文

1책

1982

敎 林

70세 출간

周易禪解

3책

1982

敎 林

70세 출간

道德經選註

3책

1983

敎 林

71세 출간

15종

74책

 

 

 


그렇다면 위와 같은 스님의 역경사업은 오늘날 불교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첫째, 스님의 역경은 조선조 초기 역경 이후 최대의 역경사업이었다. 조선조 당시 관찬(官撰)으로서의 역경사업이 상원사에 주석했던 신미(信眉), 수미(修眉)대사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스님은 개인적인 역량으로 지대한 역경사업을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이뤘다는 것은 경제면 및 역량면에 있어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일이다. 스님의 역경은 신미, 수미대사의 정신을 이어 한국불교사에 그 위업을 빛냈다.
둘째, 스님의 역경 불전(佛典)은 전국 불교강원의 교재로 대두되어왔다. 사집(四集), 사교(四敎)는 물론 일반 신도의 불경에 대한 지침서이다. 따라서 스님의 역경은 일시의 교화에 그치지 않고, 백세에 길이 인재양성의 초석이 되었다.
셋째, 스님의 역경에 대한 영향은 한국불교계의 신앙양상을 바꿔놓았다. 종래의 단순한 기복(祈福)신앙에서 진리탐구의 수행, 정진으로 탈바꿈한 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꿔 말하면 맹목적 종교신앙에서 이성적 신앙생활로 전환한 데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는 수많은 신도들이 불교 경전에 대한 손쉬운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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