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두루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수마노탑

정암사

佛塔偈 자장율사

영원한 스승이요 삼계의 주인께서는 삼천년 전 사라숲에서 열반에 드셨지만 진신사리 지금도 여기에 남아 뭇 중생들 예배가 끊임이 없네.

하늘이 처음 열리던 때에 태백산 위에 세 개의 나무 상자가 있었다. 미륵 부처님의 용화세상이 되면 위쪽 함에서는 부처님의 이름이, 중간 함에서는 경전의 이름이, 아래 함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고 한다. 봉우리 또한 셋 있으니 동쪽의 천의봉, 남쪽의 은대봉, 북쪽의 금대봉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보탑이 셋 있으니 그 첫째가 금탑, 둘째가 은탑, 셋째가 수마노탑이다. 지금까지 수마노탑은 보존되고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감추어져 눈에 띄지 않는다. 산에 올라 약초 캐는 사람들은 이따금 보기도 한다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세 탑이 있었는데 두 탑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암사 경내에서 약 100m쯤 위에 떨어진 적멸궁 뒤편,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水瑪瑙塔)이 서 있다.


지대석은 모를 죽인 화강암재로 6단을 쌓아 올렸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하여 모전석재(模塼石材)로 2단의 굄대를 그 위에 마련하였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 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 두께 5~7㎝의 크기인데, 수법이 정교하고 표면이 잘 정돈되어 있어 얼른 보면 전(塼)을 사용한 것과 같다. 초층 옥신은 한 변이 178㎝로 15단을 쌓아 높이 103㎝의 사각형을 만들었고, 초층의 옥신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틀을 짜서 감형(龕形)을 설치하였다. 문비(門扉)는 1매의 판석으로 만들어 졌으나, 중앙에 종선(縱線)을 음각하여 2매의 문비임을 나타내려고 하였고, 중심에는 철제 문고리를 달았다.
옥개는 전탑 특유의 형식으로 추녀 넓이가 짧아지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상하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으며, 상층 일부에 풍령이 남아 있다.
옥개 받침은 초층에서 7단으로 되어 있으나, 상층에 갈수록 1단씩 줄어들어 7층에서는 1단이 되었고, 옥개석 위쪽의 낙수면 층단도 초층에서는 9단으로 되어 있으나, 층을 거듭할수록 1단씩 줄어 7층에 이르러서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 위에 모전석재 2매를 얹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하였다. 이 청동제 상륜은 투각된 오륜 위로 복발과 보륜을 두었다. 보륜 위에는 다시 병형(甁形)을 얹었으며, 그 목에서 네 가닥으로 돌출된 끝에는 풍경을 달았다. 제일 정상에는 위가 크게 외반된 수연을 얹었으며, 병형의 목에서는 철쇄가 내려와 4층의 옥개까지 이르고 있다.
이 탑은 거대한 편은 아니나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옥개 우각 추녀 밑의 상향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투각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화문이나 안상문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층의 모전석이 결실되거나 파손되어 보물로 지정할 때부터 보수 문제로 논의되어 오다가 1972년 전면 해체•복원되었다.
해체수리과정에서 3층 옥신부터 기단부까지의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이 발견되고, 기단부 최하단석 밑의 적심부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청동합, 은제외합, 금제외합 등의 사리장엄구 그리고, 염주 및 금구슬등이 발견되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탑지석에 의하면 이 탑의 현재 모습은 1653년의 중건 때 갖추어진 것이고, 탑 앞의 배례석과 기타 경내에 남아 있는 여러 유물과의 비교, 검토에서 그 초창의 하한은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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