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71. 자장율사의 구도(대구일보)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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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25-10-28 11:16 조회1,727회 댓글0건본문
[신화속의 역사] 71. 자장율사의 구도
- 강시일 기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을 등지고 구도의 길에 든 자장율사, 당나라 수도 이후 귀국해 황룡사구층목탑 건립 건의, 통도사와 분황사에서 불교 중흥 꽤해

신라십성으로 꼽히고 있는 자장율사는 신라 진평왕 당시 재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덕여왕 대에 아버지의 죽음에 상처를 받아 처자식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택해 결국 신라의 국통이 됐다.
자장은 처음 불교의 진리를 탐구하는 삼매경에 빠져 선덕여왕의 부름도 마다하고 사방에 가시나무를 두르고 천정에 끈을 목에 매달아 졸음을 쫓아가며 수련에 몰두했다. 그러다 여왕의 명을 받아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문수보살의 계를 받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신라로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황룡사구층목탑을 설립을 건의해 삼국통일의 근간을 마련했다. 그는 통도사를 지어 해인사, 송광사와 더불어 신라 삼대불보사찰로 발전하게 하며 신라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신화전설 1: 자장율사와 황룡사9층목탑
먼 옛날 신라의 밤하늘에서 별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불빛처럼 한 귀족 여인의 가슴으로 들어갔고, 그날 밤 그녀는 꿈속에서 한 스님이 “이 아이는 부처의 뜻을 따를 사내”라 일렀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고 그의 이름은 선종랑(善宗郞), 훗날 자장율사가 됐다.
자장은 신라의 진골귀족, 무림 소판의 외아들로 자랐다. 총명하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지만, 세속의 영화에 물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자장은 깊은 슬픔에 젖어 “내가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진리를 따를 수 있으랴”고 한탄하며 가출해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처와 자식을 떠나 집과 땅을 내놓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원녕사를 짓고 수행에 몰두했으나, 마음의 평온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암자에 기거하며 날카로운 가시덤불 가운데서 명상하며, 마음의 미혹을 제거하고자 몸이 찔리는 고통도 감내했다. 어느 날 꿈에 하늘에서 빛나는 존재가 내려와 “오계를 수지하라”는 뜻을 받들며 진정한 출가자가 됐다.

그즈음 선덕여왕이 병을 앓았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고, 도사들조차 고개를 저었다. 대신들은 자장을 궁으로 부르자고 했고, 여왕도 명을 내렸다. 그러나 자장은 불응했다. 세 번이나 부름을 거절하자 여왕은 최후통첩을 내린다.
“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자장은 “계율을 어기고 사느니, 차라리 지키다 죽는 것이 불자의 도리이옵니다”라며 끝내 궁으로 들어가는 명을 받들지 않았다.
결국 왕은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장은 마침내 당나라로 향했다. 그는 청량산에서 수개월간 기도하며, 꿈속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불사리, 가사, 불두골을 받는다. 그 보살은 금빛 게송을 전하며 “이 법은 부처의 핵심이다”라 말하고 사라졌다. 자장은 그 법보들을 품고, 당 태종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경전과 대장경을 가득 실은 채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로 귀국하자 백성들은 “부처님이 돌아오셨다”며 환호했고, 여왕은 자장을 분황사에 주석하게 했다. 그러나 나라의 혼란은 계속됐다. 자장은 여왕에게 고했다. “불법을 수호할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상징이 없는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면서 황룡사구층목탑 건립을 건의했다.
탑은 각 층마다 신라를 위협하던 9개국의 이름을 새겨 넣고,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쌓아 침략을 물리치고자 했다. 백제에서 장인을 초청해 탑을 세우기로 했으나, 첫 삽을 뜨던 날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불길하다고 했지만 자장은 “부처님의 탑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선언했다.
645년, 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되던 날, 하늘엔 다시 맑은 햇살이 퍼졌고, 백성들은 탄성을 질렀다. 탑 안에는 불사리와 대장경이 봉안됐으며, 여왕은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했다.
이 목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의 정신, 불법의 기둥, 그리고 삼국통일의 희망을 머금은 신성한 탑이 됐다.

◆흔적: 황룡사구층목탑과 통도사
-황룡사9층목탑은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율사의 건의에 따라 세워졌다. 여왕의 병이 악화되던 시기, 자장은 “나라의 기운을 하나로 모을 정신적 상징이 필요하다”며 탑 건립을 주장했다. 탑의 각 층에는 신라의 적국 9개국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탑이 완성되면 이 적국들이 신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백제의 장인을 초빙해 공사를 진행했고, 공사 중 대지가 진동하고 불빛이 하늘로 솟구치는 이적이 나타났다.
645년에 완공된 이 탑은 높이 82미터, 9층 구조의 장엄한 목탑으로 신라의 국력과 불심을 상징하는 대표적 불탑이었다. 비록 고려 시대 이후 소실됐지만, 그 신화적 상징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 영축산에 위치한 사찰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646년에 창건했다. 산의 형상이 인도의 영취산과 닮아 ‘영축산 통도사’로 불린다.
통도사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하여, 불상 없이 사리탑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이로 인해 ‘불보사찰’이라 불리며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한국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힌다.
대웅전 뒤 금강계단에는 현재도 부처의 사리가 봉안돼 있다. 그 옆에는 구룡신지라는 연못이 있다. 이는 자장이 구룡을 제도하면서 한 마리만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통도사는 또한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계율 중심의 수행처로 발전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신화전설 2: 자장율사와 문수보살과의 인연
신라의 성스러운 승려 자장율사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길을 닦은 고승이었다. 황룡사9층목탑을 세워 불법의 기둥을 세웠고, 통도사 금강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해 신라에 불심의 중심을 심었다. 그러나 자장의 마음속에는 늘 꺼지지 않는 작은 불덩이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지 못했노라. 육신은 진신을 향했으나, 영혼은 아직 문 앞에 머무는구나.” 그는 더 큰 깨달음을 구하고자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중국 당나라 청량산, 문수보살의 화신이 머문다는 영험한 산이었다. 열 명 남짓한 제자들과 함께 험한 길을 넘어 산중의 암자에 이르자, 그곳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문수보살의 석상이 있었다. 자장은 일곱 날 밤을 그 앞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 마지막 날 밤, 꿈속에서 석상이 빛을 내며 살아 움직였다. 문수보살이 이마에 손을 얹으며, 형형한 눈으로 자장을 바라보았다. “이 계(戒)의 글을 받으라” 하고는 인도의 고대어로 된 범어 게송을 전했다. 깨어난 자장은 그 게송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뜻을 풀지 못했다.

바로 그때 붉은 가사를 입은 노승이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장에게 다가와 게송을 해석해 주며 “이 법은 온 우주의 근원이며, 부처의 진신이 너에게 내린 첫 인도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석가세존이 쓰던 가사, 사리, 불두골, 그리고 밥그릇 하나를 자장에게 건네주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자장은 이 성보들을 품고 귀국했고, 그것들을 봉안하기 위해 통도사를 창건했다. 불법은 번성했으나, 문수보살을 직접 뵙지 못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나섰다. 이번엔 신라의 북방, 오대산이었다. 예로부터 만명의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그 산에서 자장은 세 차례나 시도했지만, 세상은 흐리고 길은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노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자장은 곧장 태백산 대송정으로 향했다. 밤이 깊도록 기다렸다. 하지만 보살은 오지 않았다. 그는 절망 속에 말없이 태백산 칡넝쿨 가득한 곳에 암자를 짓고 기다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수개월이 흐른 어느 날, 거지처럼 해진 두루마기를 입고 삼태기를 멘 노승 한 명이 찾아왔다. “자장을 만나러 왔소.” 제자들은 놀라서 그를 막았고, 자장 또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무심하게 지나쳤다.

노승은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남기고 삼태기를 엎었다. 그 안에는 한 마리 강아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순식간에 빛나는 사자보좌로 변했다. 노승은 사자보좌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빛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순간 자장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문수보살이셨다! 나는 또다시 그를 알아보지 못했노라!”고 외치며 자장은 허겁지겁 빛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칡넝쿨 우거진 고갯마루에 다다랐을 때, 빛은 이미 멀어지고, 산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멈춰서며 깊은 탄식을 토했다. “나는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겠구나.” 자장은 자신의 길 끝이 여기까지라고 느꼈다. 미련도, 후회도, 이제는 없었다. 마지막 깨달음을 품고, 자장은 몸을 던져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다. 제자들은 그를 산 속 바위 굴 안에 모셨고, 훗날 그 자리는 정암사가 됐다.
자장은 문수보살을 보지 못했는가? 아니다. 그는 이미 세 번이나 문수보살을 만났고, 세 번 모두 알아보지 못한 채 보내버렸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 진실이 있었다. 깨달음이란 만남보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정진하는 그 여정 자체임을 자장은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그래서 자장은 실패한 구도자가 아니라, 인간적 불자의 상징이자, 마지막까지 문을 두드린 구도자로 기억된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원문출처 : www.idaegu.com/news/articleView.html?idxno=65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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