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최시형의 기도의 산 ③ 적조암 49일 기도(불광미디어)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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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25-11-07 10:34 조회1,654회 댓글0건본문
태백산 정암사(淨巖寺)는 최시형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1872년 정암사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드렸고, 본 절인 정암사에서 훗날 다시 기도를 올린다. 동학사서에 갈래사(葛來寺)라 기록된 곳이 지금의 정암사다.

적조암 49일 기도는 동학사서에 특히 중요하게 기록된다. 관의 체포를 피해 일월산을 떠나 다시 동학 조직을 재건하고, 동학의 주요 의례 그리고 최시형의 지도 체제를 확립한 시기가 적조암 기도 기간과 맞물린다.
갈래사 적조암
1871년 봄, 일월산 용화동을 떠난 최시형은 살기를 도모하며 성(姓)과 이름을 고치고, 때로는 남의 집 머슴꾼으로 살고 소를 먹이기도 하며 자취를 감췄다. 그해 8월 이필제가 문경에서 또 한 번 변고를 꾀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최시형은 잠시 머무르던 곳을 다시 떠나 태백산 깊은 곳으로 몸을 피신한다. 담담하게 역사를 기록하는 『도원기서』에서도 이 시기만큼은 꽤나 감정을 담아 기록한다.
“(때는 9월이요) 물이 있는 곳을 찾고, 한편으로 무릎이나 간신히 펼 수 있는 바위를 찾아 이파리를 쓸어내고 자리를 만들어 풀을 엮어 초막을 지었다. 밤에는 불을 놓고 낮에는 나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고사리를 캐니 그 굶주림이 수양의 자취에 못지않았다. (중략)
마시지 않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웅큼도 다 떨어지고 장 몇 술도 비어버렸다. 바람은 소슬히 불어 옷깃을 흔들고, 아무것도 입지 못해 헐벗은 몸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최시형은 실제로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던 듯하다. 어려움을 겪고 만난 이가 박용걸이고, 영월 직동에서 겨울을 보낸다. 1872년 봄이 돼 최시형이 옮겨간 유인상의 집은 정선 무은담이었는데, 영월 직동과도 멀지 않고 정암사와는 대략 20km 떨어져 있다.
49일 기도
최시형은 정선에서 49일 기도를 작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49일 기도는 스승 최제우 때부터 시작된 기도 방식이다. 최제우는 천성산에서 두 번에 걸쳐 49일 기도를 올렸다.
1856년 양산 천성산 내원암에서 시작된 첫 번째 기도는 47일째 되는 날 신비롭게 숙부의 죽음을 알게 돼 산을 내려가 마치지 못했고, 다음 해 천성산 적멸굴에서 진행된 두 번째 기도에서 49일을 마칠 수 있었다. 49일 기도는 스승으로부터 시작됐지만, 기도의 형식이 자리잡게 된 것은 제자 최시형에 이르러서다. 적조암 49일 기도에 대해 동학 역사서 기록에 여러 버전이 있는데, 『도원기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872년 10월에 이르러 강수(강시원), 김해성, 유택진 세 명이 먼저 기도처를 물색하기 위해 적조암에 들렀다. 적조암에는 노승, 즉 철수좌(哲首座) 홀로 있었다. 철수좌에게 허락을 받은 후, 최시형은 10월 15일 강수, 유인상, 전성문, 김해성과 적조암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에서야 강수는 자신들이 동학도임을 스님에게 이야기한다. 강수와 철수좌 간의 대화를 살펴보면,
(강수) “어찌 스님을 속이겠습니까? 승속(僧俗)간에 도를 닦아 성취하는 것은 한가지라,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다만 주문으로 하는 것입니다.”
(스님) “어떤 주문입니까?”
(강수) “스님은 혹시 동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까? 지금부터 주문을 외워 시작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기탄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주문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날로 시작된 기도는 손에 염주를 잡고 의관을 정제하여 밤낮으로 (정해진) 수를 정하여 읽으니 (하루에) 거의 이삼만 독에 이르렀다. 이들이 외운 주문은 아마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21자 주문일 것이다.
12월 초에 49일 기도를 마치고, 마치는 날 부도(符圖)를 그렸다.
신이한 만남
최시형 일행이 적조암에 들어올 때나, 기도한 이후 신비로운 일이 있었다. 49일간 여법하게 진행된 기도를 보고 철수좌는 최시형, 강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스님) “소승은 본래 계룡산 중입니다. 초막을 짓고 공부하는데, 꿈에 부처님이 오셔서 ‘너는 즉시 소백산으로 가라’ 말씀하시고 문득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에서 깨어 마음이 이상했지만 거두고 놓고 소백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금년 4월에 또 꿈에 가르침이 있어 태백산으로 옮겨왔습니다. (중략)
(최시형 등이 들어오기) 전날 꿈에 어느 두 사람이 부처님 앞에 와서 뵙는데, 꿈속에서 익히 보았기에 완연히 눈 가운데 있습니다. 깨어나 헤아려 보니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에 생원님들을 뵈니, 완연히 꿈에 뵌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이 기이한 꿈이 아니겠습니까?”
(강수) “저 역시 산에 들어오던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선관(仙官)이 공중에서부터 내려와 벽 위에 앉았고, 제가 선관에게 절하고 뵈었습니다. 지금 부처의 형상을 보니 역시 꿈속의 일과 같습니다.”
이 문답에 최시형도 말한다.
“나 역시 산에 들어오던 첫날에 꿈을 꾸었는데, 상서로운 봉황 여덟 마리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차례로 앞에 앉거늘 기이하게 여겨 세 마리를 싸니, 옆에 있던 사람이 각기 다섯 마리를 쌌습니다. 문득 공중에서부터 말하기를 ‘주인이 있는 봉황이다. 너는 마땅히 깊이 두도록 하라. 이후 주인을 만나거든 주도록 하라’ 했으니, 역시 상서로운 꿈이 아니겠습니까?”

훗날 역사서에는 49일 기도를 마친 후 ‘하늘이 내려준 글귀’를 최시형이 얻었다 전한다. 시기가 기도 전후로 나뉘는데, 앞의 문답을 시구로 적은 것일까?
太白山工四十九 (태백산공사십구)
授我鳳八各主定 (수아봉팔각주정)
天宜峰上開花天 (천의봉상개화천)
今日琢磨五絃琴 (금일탁마오현금)
寂滅宮殿脫塵世 (적멸궁전탈진세)
태백산에서 49일 공부하였더니
봉황 여덟을 내게 주시고 각각의 주인을 정해주셨다.
천의봉 위는 꽃핀 하늘이요.
오늘에사 오현금을 갈고 닦으니,
적멸궁전에서 티끌 세상을 벗어났네.
- 『시천교종역사』
시구는 거의 모든 동학 역사서에 기록되고, 마지막에 ‘善終祈禱七七期(선종기도칠칠기, 49간 기도를 잘 마치었구나)’라는 구절이 추가된 글도 있다. 아마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 혹은 종교적 각성을 표현한 듯하다.
최시형이 이전에 불교 혹은 사찰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이 시구는 불교와의 친연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글이다. 스승 최제우가 1858년, 금강산의 신이한 승려에게 책을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에 빗댈 수 있는 상황이다.
‘49일 기도’라는 기도의 형식, 시구에 나와 있는 ‘탁마(琢磨)’, ‘적멸궁전(寂滅宮殿’, ‘진세(塵世)’라는 단어도 불교와 친근감을 갖는다. 신이한 승려와의 만남, 동학에 불교가 개입하는 방식은 이렇다.
기도를 마친 후 전성문이 먼저 내려가고, 최시형과 강수도 유인상의 집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철수좌와 최시형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할 것이 한두 가지 더 남았다.
<참고자료>
윤석산 역주, 『도원기서』,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웹사이트>
* 기사원문 출처 : 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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