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최시형의 기도의 산 ④ 철수좌와 단양 묘적사(불광미디어) 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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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25-11-16 14:48 조회802회 댓글0건본문
- 김남수
최시형과 철수좌와의 인연은 적조암 49일 기도가 끝이 아니었다. 최시형은 이후 철수좌의 죽음을 돌보게 되고, 철수좌의 안내에 따라 거처를 단양 도솔봉 아래, 현 장정리 일대로 옮기게 된다.
단양 장정리 일대는 최시형이 꽤 오랫동안 머문 곳인데, 그곳에 묘적사라는 절이 있었다. 묘적사가 동학 기록에는 거명되지 않지만, 최시형과 어떤 인연이 있었을지 추정해 본다.
먼저 철수좌에 대해 살펴본다.
철수좌(哲首座)
최시형의 적조암 기도가 1872년인지, 1873년인지에 기록의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도원기서』와 윤석산의 글을 따라 1872년으로 보며 진행하고 있다.
최시형은 1874년 2월, 승복 한 벌을 지어 적조암을 다시 찾는다. 기도를 마친 지 1년 4개월 정도 뒤다. 그런데 철수좌는 이미 병들어 병상에 누운 지 열흘이 넘은 상태였다. 최시형이 병에 대해 물으며 철수좌에게 준비한 옷을 준다.
『본교역사』에, 철수좌는 “소승의 명이 짧아 두터운 덕을 갚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죽기는 하지만 어찌 공의 덕을 잊겠습니까? 주신 의복은 죽은 뒤 몸을 덮는 물건으로 사용하면 만족하겠습니다” 한다. 다음 날 철수좌는 입적(入寂)했다. 최시형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절간의 예에 따라 다비(화장)를 치렀으며, 한참 뒤에야 절을 내려왔다.
철수좌는 누구일까? 자료를 이리저리 살폈으나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두 가지 단서만 살펴본다.
최시형이 기도를 위해 적조암을 찾은 날, 철수좌는 본인이 “본래 계룡산 중이었고, 꿈에 부처님이 현몽해 한번은 소백산으로, 한번은 태백산으로 가라”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훗날 작성된 동학사서에는 계룡산을 동학사로, 소백산을 부석사로 기록한다.
즉, 철수좌는 계룡산 동학사, 소백산 부석사를 거쳐 태백산 적조암으로 거처를 이동했고, 그곳에서 최시형 일행과 조우한다. 그리고 최시형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순흥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이는 순흥(지금의 영주) 부석사를 이야기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두 번째 단서는, 철수좌가 죽음을 맞이하고 다비 의식을 거행할 때 함께한 승려들이다. 철수좌는 적조암에서 홀로 있었다 했기에, 이 승려들은 필시 정암사에 있던 승려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암사와 적조암은 3km 남짓 거리를 두고 있다.
정암사는 수마노탑(水瑪瑙塔)이 있고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우리나라에 이름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하나다. 당대에도 승려들이 많이 찾는 기도처였으며 수행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철수좌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기에 수마노탑 보수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마노탑의 보수를 기록한 탑지석(塔誌石)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벽암서호(蘗庵西灝) 스님이 1874년 2월 13일 수마노탑 불사를 시작해 3월 12일 길일(吉日)을 가려 탑을 열었고, 4월 초파일에 탑을 쌓기 시작하여 5월 15일 마쳤다 한다.
그런데 수마노탑 불사는 1874년 본격적인 보수에 앞서, 남호영기(南湖永奇, 1820~1872)스님이 화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호 스님은 1872년 9월 입적했다. 즉, 정암사 수마노탑 보수는 남호 스님이 1872년 어느 시기부터 준비하기 시작해 (중간에 단절이 있었을 수 있으나), 1874년 5월 벽암 스님에 의해 마무리된다. 이 시기는 철수좌가 적조암에 머물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시 철수좌는 수마노탑 보수를 위해 머물던 스님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단양 도솔봉 아래
철수좌의 장례를 치룬 최시형은 1874년 봄 정선을 떠나 단양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는 철수좌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적조암 기도를 마치며 철수좌가 최시형과 나눈 문답 중 이런 기록이 있다.
“후세에는 반드시 선(仙)과 불(佛)이 하나로 돌아갈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은 또 말했다. “소승이 나이가 많아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감히 공의 앞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신사는 말했다.
“이 몸이 구름처럼 놀면서 동쪽 서쪽으로 떠돌아다녀서 아직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상인(上人)께서 나를 위해 주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이 말했다.
“단양(丹陽)도솔봉(道率峯) 아래가 그윽하고 조용한 곳이어서 기거할만 합니다.”
- 『본교역사』에서
철수좌의 권유에 따라 최시형이 거처를 옮긴 곳은 현재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장정리 일대다. 그곳에서 1884년까지 대략 10년여를 머문다. 최시형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장소 중 하나다. 이즈음 관의 주목도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최시형은 1874년 봄 단양 도솔봉 아래로 이전하고 다음 해 2월 근처 송두둑으로 옮긴다. 그리고 1882년 근처 천동(泉洞, 샘골)으로 이전했고, 동학의 중요한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한다. 도솔봉 아랫마을과 송두둑은 현재 장정리에 속하며, 천동은 현재 남천리를 일컫는데 장정리와 이웃한 마을이다.
일반적으로 철수좌가 이야기한 ‘단양군 도솔봉(兜率峰) 아래’를 현 ‘사동(寺洞)’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최시형이 최초 이주한 곳을 사동으로 생각한다면, 최시형은 사동에서 채 1년도 머물지 않고 송두둑으로 이전하게 된다. 송두둑은 사동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로 보는 듯하다. 사동과는 지척이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지척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최시형이 최초로 이전한 곳이 묘적사(妙寂寺) 인근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도솔봉 중턱의 묘적사 인근 마을에 있다가 1년 뒤 아랫마을로 이전했다는 가설이다.
묘적사 이야기를 잠시 해본다.
단양 묘적사(妙寂寺)

묘적사는 묘적령 아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이었다. 묘적령은 죽령에서 도솔봉으로 가는 능선 위 고개인데, 이 고개를 넘으면 단양에서 경상도 풍기와 순흥(현 영주) 방면으로 이어진다. 최시형이 단양으로 이전하는 시기에 묘적사는 현존했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폐사된 절이다. 사동(寺洞)이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묘적사 인근 마을을 뜻한다.
조선 순조시대(1790 ~1834) 간행된 『단양읍지』에 “묘적사는 남쪽 도솔산 아래에 있다(妙寂寺 在郡南兜率山下). 관문에서 50리다(自官距五十里)”라 기록돼 있으며, 1899년 작성된 「단양군읍지」에도 묘적사가 표기돼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묘적사지로 부르고 승탑 6기가 있다’로 기록돼 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1940년 무렵까지 일대에 화전민 100여 호가 살았으며, 1936년 폭우로 화전민촌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다. 묘적사는 조선 후기까지 현존했으며, 일제강점기 초중반경 폐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단양 사동마을에서 묘적령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1시간 안팎 오르면 임도(林道)를 만나는데, 임도 왼쪽으로 300m 정도 거리의 길 끝에 묘적사 터가 있다.
묘적사 터에 오르면, 기와 조각이 널려있다. 땅 표면 바로 위에 있어, 폐사된 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터는 꽤 넓으며 묘적령을 배경으로 절이 있었던 듯하고, 앞쪽으로는 민가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아래에 샘터도 확인된다.



동학사서에는 최시형이 단양으로 이전한 곳을 어떻게 기록할까? ‘도솔봉 아래’로 기록한 것도 있으며, ‘도솔봉 아래 사동(道率峯下寺洞)’으로 기록된 것도 있다. 오래된 기록인 『도원기서』에는 관련된 내용이 나오지 않으며, 1910년대 기록된 『본교역사』에는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신사는 김연순(金演順)・김용진(金龍鎭)을 단양(丹陽) 도솔봉(道率峯) 아래에 보내서 먼저 그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지난날 철수좌가 부탁한 말을 따른 것이다. (送金演順金龍鎭于丹陽道率峯下야先觀其居址니以伸前日哲秀子所托之言也러라)
신사가 당시 나이가 50이 되었지만 아직 혈육이 없었다. 3월에 다시 김씨가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내의 본관은 안동이었다. 4월에 도솔봉 아래에 집을 짓고 아내를 맞이했다.
김연순도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신사는 홍순일, 김용진과 함께 천주(天主) 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워서 49일의 공부를 잘 마쳤다. 그때에 먹을 것을 마련하며 도와 준 사람 중에 안동 권기하(權奇夏)의 힘이 제일 컸다.
정리하면, 최시형은 1874년 김연순과 김용진을 철수좌가 권유한 도솔봉 아래로 보내 터를 보게 했으며, 3월에 맞이한 아내와 살 만한 집을 4월 도솔봉 아래에 지었다. 그리고 홍순일, 김용진과 함께 49일 공부를 마치는데,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안동의 권기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2월, 송부(松阜, 송두둑)로 이사한다.

동학기록에 묘적사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기 기록에 거론되는 ‘도솔봉 아래’는 어딜까? 묘적사, 혹은 묘적사 인근으로 본다. 필자의 가설을 정리하면, 최시형이 현 사동마을에서 1년 남짓 머물다 송두둑으로 옮겼다기보다, 처음 이주한 곳은 도솔봉 아래 묘적사 인근이며, 다음 해 아랫마을인 송두둑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조금 자연스럽지 않을까?
특히나 적조암의 철수좌가 추천했다면 아랫마을이라기보다는 사찰일 가능성이 높고, 이곳에서 49일 기도를 했다면 더욱 더 사찰 인근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즉 최시형은 묘적사, 혹은 묘적사 인근에 거주하다 1년 뒤 아랫마을로 옮겼을 것이다.
동학조직의 재건
최시형은 근 10년을 단양에 있었다. 이 시기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며 심신의 안정도 꾀한 듯하며, 동학에서 경전의 위상을 지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한다. 의례도 정비되며 동학 조직도 재건된다. 이때 재건된 동학 조직은 훗날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토대가 된다. 손병희, 박인호, 손천민, 서장옥 등 동학의 2세대들이 단양으로 몰려온다.
<참고자료>
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손신영, 「정암사 수마노탑 탑지석 연구」, 『헤리티지』 63호, 2014년
한상길, 「정선 정암사의 사적기에 대한 고찰」, 『정토학연구』 36집, 2021년
<웹사이트>
동학농민혁명 사료아카이브
한국의 사지 아카이브
* 기사원문출처 : 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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