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최시형의 기도의 산 ⑥ 정암사, 두 번째 기도(불광미디어)2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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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사 작성일25-12-24 09:59 조회727회 댓글0건본문
- 김남수
- 승인 2025.12.04 10:40
다시 정암사로
1887년 초, 최시형은 상주 전성촌에 머물다 3월 보은 장내리로 거처를 이전했다. 그해 1월 1일 (도인들에게)‘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씩 49일 기도식을 거행하게’ 했고,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지으니 원통봉(圓通峰) 아래서 또 통하고 통하였노라”라 강시(降詩)했다.
3월 21일 최시형의 회갑을 맞아 도인들이 모여 회합했다. 이때 최시형은 서장옥, 손천민과 더불어 정선의 유시헌 집에서 ‘칠칠(七七)의 공(工)’을 하고자 했다. 즉 49일 기도를 하고자 한 것이다. 유시헌은 1872년 최시형이 정선에 머물 때 도와주었던 유인상을 일컫는다. 이해 10월 갈래사(정암사)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진행한 바 있다.
최시형은 다시 정선으로 가고자 했다. 이 말을 들은 유인상이 권유한다.
“갈래산은 일찍이 스승이 ‘단을 열고 도를 펴던(開壇演道)’ 곳입니다. 이곳에서 수련한다면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습니다.”
기뻐하며 수락하고 갈래산(함백산, 간혹 갈천산으로 명명)으로 향한 최시형은 입산한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지도 눕지도 않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는 날, 강시(降詩)를 받는다.
불의사월사월래(不意四月四月來)
금사옥사우옥사(金士玉士又玉士)
금일명일우명일(今日明日又明日)
하하지지우하지(何何知知又何知)
일거월래신일래(日去月來新日來)
천지정신령아효(天地精神令我曉)
뜻하지 않게 사월에 사월이 오니
금사(金士) 옥사(玉士) 또 옥사로다.
오늘 내일 또 내일
무엇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알리.
날이 가고 달이 오고 새날이 오니
천지 정신이 나를 깨우치는구나.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갈래산에서 기도를 마친 최시형은 보은 장내리로 돌아왔다.
이상의 기록은 동학사서 중심의 기록인데, 이와 별도로 최시형 일행의 갈래산 기도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유인상의 아들 유택하가 1887년부터 1897년까지 활동한 사실을 기록한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다. 이 기록에 따르면 1887년 3월 최시형이 머물렀던 갈래산은 갈래사, 즉 지금의 정암사다. 최시형은 1872년에 정암사 적조암에서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본 절인 정암사에서 49일 기도를 마친 것이 된다.

『동학난중기』의 문맥이 잘 정리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동학사서의 기록과 약간 차이가 있다. 『동학난중기』를 따라가 본다.
정암사 49일 기도
최시형이 이전에 태백산 한적한 절에서 공부한 후로 항상 말하기를 “명산(名山)을 말하시며 일이 끝난 후에는 공부(工夫)하라” 말했다. 그리고 1887년 3월 서장옥과 갈래사에서 공부하는데, 갈래사의 주승(主僧)은 청암(淸菴)이었다. (기도를 위해) 요과랑 등뉴 등을 준비했고, 유인상에게 당부하기를 “여러 사람들을 분주하게 하지 마라” 하였으나, 각처의 도인들이 이를 알고 몰래몰래 서로 만났다.
4월에 이르러 손사문(孫士文, 손천민)이 도착해 “태백산에서 공부할 곳을 정해 주기를, 감자와 양식을 갖고 지내기를” 청했다. 유인상이 최시형에게 말씀드렸고, 근처 능인암의 주승(主僧) 전수좌(全首座)에 부탁해 감자와 양식을 부탁해 지내게 했다.
갈래사에서 기도를 마친 최시형이 (유인상의) 집으로 돌아오니 근처에 있는 도인 10여 인이 왔다. 최시형은,
“태백산 상봉(上峯)은 하늘에 있는 천의봉(天義峰의有天의峰)이고, 또 위로는 금대봉(金大峰)이 있고, 또 수만석(壽萬石)이 있으니 명산이다. 또 사찰과 산은 우리 도와 합치하는 덕이 있으며(又寺山은吾道合德之), 도는 용담으로부터 나와 정선에 있다(道自龍潭칙근어旌善).”
라고 말했다. ‘도가 용담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스승 최제우가 깨침을 얻고 도를 편 곳이 경주 용담이라는 것을 말한다. ‘용담으로부터 나와 정선에 있다’라는 표현에서 최시형이 정선, 특히 정암사에 지닌 애정이 보인다.
최시형은 이어서 “올 회갑에 다시 이 산에서 공부하며 지내니 하늘이 내린 덕(天사지덕)”이라 말했다.
『동학난중기』의 기록이 여타 동학사서와 다른 부분은, 최시형이 정암사 기도를 3월 서장옥과 시작했으며 4월에 이르러야 손천민이 결합한 것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또 강시 기록이 빠졌다.
특이한 점은 공주 가섭사 기도에 손병희와 박인호가 결합했다면, 정선 정암사 기도에는 서장옥과 손천민이 결합했다는 것이다. 정암사 기도를 마친 최시형은 다시 충청도로 향한다.
1892년 정암사 기도

『동학난중기』에 따르면 태백산 정암사에서 동학 도인들의 기도가 한 번 더 있었던 듯하다. 최시형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정선의 도인들이 1892년 4월 정암사로 다시 모였다.
임진년(壬辰年, 1892) 3월, 최시형은 “각도 각처의 명산이 정결하니 천일기도(千日祈禱)를 분부했”고, 이철우(李哲雨)에게 강원도 태백산에서 오십일 기도하라 했다. 도인들은 4월 입산했는데, 그때도 주승(主僧)은 청암 노승이었다. 노승은 사내(寺內)쇄소와 빈 객실을 내주고, 전수좌(全首座)를 공양주로 정했다. 그리고 도인들에게 “가지가지 일에 대해 청수를 올리고, 치성을 드리라”했으니, 50일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각처의 도인들이 몰래몰래 와서 참배했다.
50일이 지나 기도가 끝나자 절 내의 사람이나 손님 모두가 즐거워했고, “백 가지 일이 법도에 맞게 질서가 수립되어 하늘이 감응했다”. 도인들이 나올 때 스님은 모두에게 감사하면서 “부처님이 감응한 덕”이라 말했다.
후에 이야기를 들은 최시형이 크게 기뻐하며 “(내가) 여러 곳에 연고가 있으나, 태백산 기도는 도심(道心)도 있고 하느님 명감도 있다”라며 칭찬했다.
1887년, 1892년 정암사에서의 기도 두 번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암 노승과 전수좌다. 1872년 적조암 기도에는 철수좌가 등장하는데, 철수좌가 기인의 기질을 지녔다면 청암 노승과 전수좌는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최시형이 기도를 마친 그해 7월 정선군 관료들이, 그리고 1년 후인 1888년 5월에는 정선군수가 정암사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정선군수 오횡목이 군수 재직시의 일을 기록한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1887년 7월, 정선군 관료들이 갈래사에서 7일 축원 기도를 하는데, 등장하는 승려들은 덕월, 시연, 운악, 성오이다. 정선군수 오횡묵은 1888년 5월 정암사를 방문한다. 그때 정암사에 있던 승려로 인우, 기엽, 계환, 달상, 달현, 성안, 성호, 청화를 기록한다.
두 시기 모두 청암 노승과 전수자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법명과 법호 등 기록하는 이름이 달라서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암사 기도에 공양주를 담당했던 전수좌는 『동학난중기』에 한 번 더 등장한다. 1894년 동학혁명의 패퇴 후, 산 속에서 겨울을 난 유택하는 여러 곳을 거치며 피신하다 1895년 3월 16일 정암사에 도착한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산령탄일 불공일이었다. 유택하를 본 전수좌는,
“액운이 미진하였으니 피신하소서. 아시는 바, 큰일은 재천명이요.”
유택하는 다음 날 태백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해 목숨을 연명한 것으로 기록된다.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동학의 기세는 강원도와 충청도를 넘어 전라도를 향하고 있었다. 손화중, 김덕명, 김개남에 이어 전봉준이 도에 입문했고, 최시형은 전라도를 비롯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포덕(布德) 활동을 진행했다. 최시형이 산과 사찰에 머물기에는 눈 앞에서 다사다난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참고자료>
윤석산,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모시는 사람들, 2021년
정선문화원, 『정선의 항일 민족운동』, 예문사, 2021년
정선문화원 편, 『국역 정선총쇄록』, 경인문화사, 2002년
최종성, 「동학산행: 산으로 간 동학의 기록들」, 『종교학연구』 제37집, 한국종교학연구회, 2019. pp. 1-37.
<웹사이트>
동학농민혁명 사료아카이브
* 기사원문 출처 : www.bulkwang.co.kr/news/articlePrint.html?idxno=4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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